전시안내
감각의 기념비,점토,2025,29X28X62
청자사발,2025,강진점토,16X16X7.5
청자완,2026, 점토,12X11.5X9
청자잔,2025,강진점토,8X8X11
청자접시,2025,점토,20X20X4
청자주자,2026,강진점토,16X9X14
청자주자,2026,점토,16X9X20
청화분청접시,점토,27x27x4.jpg
UPCOMING : 정호진 | Blue Gray

 

 

 

 

 

 

 



Hakgojae Artcenter 1F



2026. 3. 25 - 3. 31





 

 

블루그레이, 스며, 들다

 




 

그의 작업장은 12,3세기 최고의 고려청자들이 탄생했던 강진 사당리 가마터 옆에 있다.
고려청자박물관 옆 사철 푸른 녹나무 숲속, 스며들면 그의 작업장이 나온다.
그는 그곳에서 기도를 하고, 작업을 시작한다. ‘제발 도자기로 먹고살게 해주세요.’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풋!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내 현실의 경계 너머 녹나무 숲속 청자의 시간들이 고여 있는 곳 아닌가? 그가 의식하든 아니든 이곳은 에보리진이 말한 청자의 혼이 서린 꿈의 시간대일 것이다.
올 곳에 왔구나.
 
장군항아리에서 발전한 우뚝하고 긴 항아리들을 그는 감각의 기념비라 불렀다. 평생 흙맛 손맛에 취해 살아온 그는 그것을 다섯 손가락이라 했다. 전통적 기물에서 작품으로 변화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그는 완전한 걸 싫어한다. 살짝 벗어난다. 그렇다고 벗어나진 않는다. 그 경계에서 유희하며 삶의 감각을 연주한다. 항아리의 입술도 틀을 벗어나지만, 자연스럽게 입구로 향하며 마무리 된다. 도톰한 입술은 버리고 날카롭지 않게 불완전한 변화 속에 부드러운 속삭임처럼 감춘다. 그릇에 삶을 담는 그의 방식이다.
그릇 만드는 자의 숙명이 그렇다. 그릇에서 출발하지만 그릇에 갇히면 그릇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릇이지만 그릇을 잊는 그릇이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 있는 그릇이 된다. 살짝 벗어나 너머를 보지만, 벗어나지 않는 다정함으로. 그 경계에서 그는 서성일까?
머그컵 두 개를 포개어 접합해 놓은 필통(혹은 긴 머그컵)도 그렇다. 그것은 마디로 연결된 대나무 필통을 연상시킨다. 수직은 역시 그의 사내다움을 보여준다. 달항아리와 비교하면 접합부의 경계를 얼버무려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대나무를 연상시키지만 그 형상을 따르지 않고, 각기 다른 두 개의 컵이 포개져 대화를 하듯, 상하의 비율과 크기에 차이를 주어 미적 변화를 음미하도록 유도한다. 기부에 드러난 태토와 화장토에 난 흔적과 그 위를 흘러내린 반투명한 유약은 흡사 잔잔한 날의 바다 표면을 응시하며 건듯 부는 바람의 물결 변화를 음미하는 것 같다. 고요하지만 살아있다.
최근 그의 대접과 접시들은 점점 순백의 고요로 다가가는 은은한 청자빛이다. 빛이 반사되기보다 은은하게 스민다. 때문에 몸체의 굴곡에 진 음영과 니들로 그은 선화가 음악적으로 느껴진다. 흡사 모노크롬의 음표 같다. 그에게 얼룩과 흠과 굴곡과 흘러내림은 그저 재즈를 연주하는 기법이다. 청자의 안온한 빛 안에서 부드러운 흙의 재즈를 연주한다.
 
그는 평생 두 세계의 간극을 접합하려 노력했다. 꿈과 현실 사이 어스름 속에서, 그곳은 때로 압박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해방의 공간이었다.
무(巫)는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람이며 예술가였다. 수억 년의 시간을 견뎌온 흙을 주무르고 형상을 빚어 하늘빛 옷을 입히는 그도 무일 것이다. 이 땅에 하늘을 스미게 했으니. 그가 빚은 고요한 순백의 청자에 깃드는 것은 분명 예술의 혼이다.
 
그는 스며드는 청자의 빛을 찾았다고 했다. 나는 물새와 알을 떠올렸다.
아 저 빛의 둥우리엔 방황하는 영혼도 깃들겠구나. 어른어른 스미겠구나.
누군가도 그 그릇에, 스며, 들리라.

 






작가노트



 

 

물레는 나의 악기이다.
나는 그 위에서 흙을 연주한다.

그릇이 만들어지면
무슨 옷을 입힐지 고민하다
이 시대의 비색을 입히기로 했다.